재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매체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작가들은 경이롭다. 무명천 위에 작업을 하는 설혜린 작가도 그러한 작가들 중 한 명인데, 그녀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화로 작업을 할 때 느낄 수 없는 천 재료만이 가진 '번짐 효과'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. 자연스럽게 스며든 물감은 천 위에 아름답게 수를 놓는데 이 형상은 의도한 것 같으면서도 의도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. 작열하는 태양 같기도 하고, 피어나는 꽃 같기도 하다.
"저는 천에 염색을 한 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데, 우연적으로
염색된 무늬에서 연상되는 것을 그립니다. 우연적이며 추상적인 무늬에서부터 구체적인 모양을 잡아가는데 그 모양이 구체적이되 우연적인 무늬를 너무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화하려고 노력합니다. 그래서 염색된 색과 무늬도 제가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염색을 하곤 합니다." -설혜린 작가 인터뷰中-
이러한 과정을 거친 작품은 우연성으로부터 획득한 추상성으로부터 새롭게 영감을 받아 작업을 이어간다. 천이 염색되는 공정은 많이 까다로울 수 밖에 없는데 뜨거운 물 속에 천을 넣어 끓고, 그 후 끈으로 꽉 묶거나 집게로 집는 고문에 가까운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. 인간의 삶이 고통이라고 봤을 때 이러한 과정은 크게 인간의 삶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. 그러나 고통이 지나간 후 아름다운 색과 무늬로 탄생한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시 한 번 삶이 고통만은 아니였음을 깨닫는다. 고통스러운 날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층 더 성숙해진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에 물들어 갈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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